렌즈 2012. 9. 6. 12:58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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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만으로 행복하다.                                        

이정도로 만족한다.                                        

참으로 소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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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2012. 9. 6. 12:47

나잇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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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억원?

33만원?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면 최대한 낮게 잡아야겠지?

 

"33,000"

 

그래 삼만삼천원쯤이야.. 뭐..

소중한 사람들한테 소박하게나마 밥한끼 대접할 수 있을 정도의 나잇값만 하고 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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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2012. 9. 6. 12:24

건 망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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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건!

난 절대로 까마귀고기를 먹지 않았다는거...

 

설..마. 까마귀고기를 먹은 사실조차 잊어버린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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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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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우러러 점 부끄러움 쯤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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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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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한 자 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햄릿, 그대 너무 순진한거 아니오?

 

  .            

   한 자 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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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 2012. 9. 5. 18:34

가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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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일거란 착각보다 위험한게 또 있을까?

 

그게 사람일지라도...

.

.

.

.

 

 

Canon EOS 40D           

촬영날짜 2012.08.14 13:16             

해상도 3888 x 2592             

Orientation Normal             

플래쉬 사용 No             

초점 거리 85.0mm             

셔터속도 1/640s             

조리개 값 F5.0             

ISO 값 400             

노출보정 EV0.0             

측광 모드 Evalu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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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2012. 9. 5. 18:11

명성황후와 민비사이(1851~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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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민자영이라고 가장 많이 알려져 있으나,

민아영,민정호 등 각기 다른 이름들도 거론되고 있어

어떤이름이 그녀의 진짜 이름이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사진찍는 걸 싫어했다고 하는데 그때문인지

그녀의 사진이라고 알려져있는 여러장의 사진들 속에는

조금씩 다른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어떤 사진이 그녀인지도 아직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다.

 

 

 

독일의 한 사진작가가 찍은 Die Ermodete Konigin(살해당한 왕비)

 

 

 

 프랑스잡지 '르 뚜르 뒤 몽드'에 실린 그녀의 사진

한때 교과서에까지 실리며 그녀의 실제 사진이라 여겨졌으나

현재는 교과서에서 빠진 상태이다.

(그 덕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그녀의 모습이다.)

 

 

일본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한 조선의 마지막 국모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명성황후 또는 민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중 시해사건에 관련되어서는 뮤지컬, 드라마, 책등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특히 1995년 명성황후 시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뮤지컬 명성황후는 초연 당시 총 12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에 걸맞게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대상을 비롯한 5개부분에서 상을 휩쓸었으며, 미국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외에도 김진명의 역사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은 오랜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된 다수의 작품들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일반인은 물론이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호칭문제로 각자 다른 목소리들을 내고 있는데....

 

명성황후 or 민비

 

말그대로 호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이 두 호칭 중 어느것을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그녀에 대한 평가가 확연히 달라지기도 한다.

 

"민비"라는 호칭은 일본에서 명성황후를  비하하기위해 쓰는 말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나

우리역사서에도 종종 등장하는 표현이라 틀린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다.  

보통 민비호칭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민중들의 현실은 무시한 채 외교(청,러)에만 힘썼다.","사치가 심했다.""매국노다.","민중들이 먼저 죽이려고 했었다."

등의 이유로 그녀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대부분이기에 민비라는 호칭은 그녀를 '낮춰부르는 말'이라는 인식이 있는것이다.

한때 유인촌 전 장관이 강남소방서 강연에서 "민비"라는 호칭을 사용해 떠들석했던 이유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왕후가 죽은 후에는 시호라는 이름을 내리게 되고, 그녀의 시호는 명성황후이기 때문에

이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며, 명성황후라 부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긍정적인 면을 우선시 하거나, 아무리 그래도 왕후인데 민비라는 호칭은 적절치 못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근 영화나 드라마등에서 실제와는 상당부분 다르게 그녀를 미화시켜 제작한다는 것도 문제다.

시청자 중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민비호칭에 과민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민비라는 호칭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데,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양파도 아닌것이 까면 깔수록 안좋은 기록들만 나온다.

그녀가 고종의 비가 되고, 이때부터 정권의 부패가 시작된다.

(국가예산의 1/6을 탕진했다고 해서 "조선된장"이란 우스갯소리도 한다.)

이로인해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그녀는 궁궐을 빠져나가 도망 쳐 목숨을 건진다.

권력에서 밀려나자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게 한 후 다시 권력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때 청나라를 끌여들여 진압하기도 했다.

이런일들로 인해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이 조선땅에서 치뤄지게 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그녀는 일본이 무서워 하는 러시아와 외교를 펼치려 노력하고,

이때문에 을미사변이라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된것이다.

그녀는 당시 궁녀로 변장하고 있다가 발각되어 살해되었다고 한다.

(살해된 장소는 복도나 마당 등 여기저기서 다르게 말을 하고 있어 정확치 않다는 표현이 맞겠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교과서나 역사서에 나와있는 글들이 얼마나 사실적인지는 알 수 없는게 사실이다.

 

틀리다와 다르다는 엄연히 다른의미라는 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즉, 둘 중 어떠한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서 다른 호칭을 쓰는 사람들에게 틀렸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여 각자의 기준에서 나름대로의 판단으로 입맛에 맞게 선택하면 되는

결국엔 논란의 요지가 될 가치가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조선의 국모다." 라고 말한것은 명성황후, 즉 민비가 아니라

드라마 작가가 써준 이미연(극중 명성황후)의 대사였을 뿐이라는 것.

 

 

 

 

 

                       프랑스에서 최초 발견된 명성황후의 초상화이며, 뒷편의 그림자는 명성황후를 지키던 홍계훈이라 추측.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2009)"는 이 둘의 사랑을 연출했으며, 초상화속 명성황후가 수애(극중 명성황후)를 닮아 화재가 되기도 했다.

 

타인 2012. 9. 5. 11:58

그 청년이 아름다운 이유 -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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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5백 여명의 평화 시장 노동자들이 국민은행 앞에 모였다.

현수막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쓰여있었고

경비원과 경찰들이 5백명의 노동자들에게 몽둥이로 맞서고 있었다.

 

그때 한쪽 골목에서 어린 청년이 근로기준법 책을 품고 나온다.

순식간에 그 청년의 옷 위로 불길이 치솟았고 전신은 금방 불길에 휩싸였다.

그는 "근로기분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며 구호를 외치며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간다.

결국 쓰러져버린 그는 인근에 있는 국립의료원으로 후송되지만 결국 숨을 거두게 된다.  

 

노동자들의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해 분신한 그가 바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며, 당시 그의 나이는 만22살 이었다.

                            

 

  ⓒ 이상엽

 

전태일 / 노동운동가, 피복공장 재단사

(1948.8.26 ~ 1970.11.13) 

 

 

 

 

 .  .  .                                                               

전태일 그는 많이 배우지도 그렇다고 가진것이 많은 자도 아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평화시장에서 재봉사로 일을 하게 된다.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 또한 자신의 이익과 편함보다는

 

그곳에서 함께 일하는 어린 소녀들이 노동자의 기본생활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근로 기준법이란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사당하는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근로 기준법을 스스로 공부하여 노동청과 회사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대통령에게 편지까지 보내며, 근로환경 개선에 대한 애절함을 호소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자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세상에 외친다. 

 

꺼져가는 숨을 몰아쉬며 그는 마지막까지 "내 죽음 헛되이말라"라는 말을 남겼다.

 

 

 

 

 

배울만큼 배우고 알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힘든 단어들을 섞어가며

 

보기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은, 그것이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법이 아닐까?

 

그는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학력으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 대학생들은 어린소녀들이 일요일도 없이

 

하루 열 다섯시간을 꼬박 일해가며 병들어가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지

 

정말 도움을 줄 수 있는 대학생이 없었을까? 라는 의문점이 든다.

 

혹시,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좀 배웠다는 이유로 발 밑은 보지 못한채 잘못된 나라를 바로 잡아보겠다며

 

자기들끼리 뭉쳐 학생민주화운동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배우지 못했다고 똑똑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전태일은 분명 똑똑하고 현명한 청년이였으며,

 

지독한 가난으로 힘들게 살았지만, 자신보다 힘없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아니 자신이 할 수 없는데까지도 해보이며 자신을 희생했다.

 

그 어린청년이 어떤 힘으로 이리도 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어쩌면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 학업을 이어갔더라면

 

좀 더 큰 인물이 되어 좀 더 영향력있는 일을 일구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회 약자였던 전태일은 나약하지 않은 생각과 행동으로 큰 변화를 이루어 내려 노력했고

 

자신의 희생으로 인해 더 이상 노동자들이 고통받지 않길 바랬을 것이다.

 

용사참사나 쌍용자동차 사건을 보고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적지 않을 것이다.

 

전태일이 그가 아름다운 이유는

누구나 생각은 하지만 그 누구도 실천하지 못한 일을 해내서가 아닐까?

 

 

 

 

 

 

 

그가 마지막 남긴 말 "내 죽음 헛되이 말라"

 

분명 그의 죽음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가 한 노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잠 안오는 주사를 맞아가며 손이 마비된 채로 재봉틀을 돌린 여중생들

 

삶의 터전을 빼앗아가며 적절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죽음으로 내몰린 철거민들

 

평생 일해온 직장을 한순간에 빼앗기고, 자신을 지켜줄거라 믿었던 사회에 배신당해 삶의 끈을 놓을 수 밖에 없었던 해고자들

 

스스로 눈감아버리면 언젠가 내 일이거나, 내 가족들에게 닥칠 수 있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노동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전태일의 일기 -

1970년 08월 09일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사건,

참으로 전태일 보기 민망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타인 2012. 9. 5. 11:57

놀 줄 아는 남자 - 싸이(P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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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 Y

( 박재상/가수, 음악PD/'77.12.31 ~ )

 

 

.  .                                                

엽기라는 트랜드가 붐을 일으키던 2001년

 

비범한(?) 외모의 한 남자가 싸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을 낸다.

한순간에 새가 되었다며 요상한 자세를 취하던 이 남자, 

3개월만에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는 아이콘으로 급부상 

 

2012년 그 요상한 남자 싸이는  전세계의 이목을 끌기 시작하는데...

 

 

 

 

아! 이남자! 진심 궁금하다.

 

1977년 12월 31일 소위 있는집에서 부러울것 없이 자란 박재상

 

제대로 놀아보려는 심보로 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 때  "아버지! 저 박재상 한국 너무 좁습니다. "라는 허세로 아버님 쿨하게 승락)

 

한국에서 보내주신 학비로 음주가무를 즐기고 즐기고 또 즐기던 중

 

노래를 못해도 가수가 될수 있는 랩퍼의 길에 눈을 뜨게 되고

 

학비로 악기를 구매하여 버클리음악대학(Berklee College of Music)에 입학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버클리음대(UC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와는 다른 학교임.

 

버클리에 입학하면서 집에 알려져 모든 지원이 끊어짐.

그때부터 불법CD(음악이 끊이지 않게 나오는)복제로 유명세를 타고 돈도 좀 만졌다함.

 

그러던 중 아는 분(조PD)이 인터넷에 음악을 올려 주목받는 걸 보고 따라올렸다가

조PD와 같은 기획사에 캐스팅 됨.

 

그 기획사에서 비행기표를 보내주어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기획사에서는 상상치도 못한 싸이의 외모를 보고 할말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회식자리에서 평소 놀던대로 테이블위에 올라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기획사 사장님께서 "이거면 먹히겠다." 싶어서 1집앨범 [Psy From The Psycho World] 발표, 삼개월만에 음악차트 1위에 오름.

 

그리고 대뷔 5개월쯤 대마초흡연으로 뉴스에 출연

 

자숙의 기간을 갖어야 할 시기에 2002한일 월드컵 광화문 거리응원에 나가 리포터의 눈에 띄어 갑자기 인터뷰하게 되면서

 

자숙의 기간도 없이 바로 방송활동 재개

 

2,3집을 말아먹고 있던 어느날

 

" 사랑노래 안하던 싸이가 사랑노래를 한다?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분들 많으시죠? 저 장가갑니다. "

 

연예인이라는 노래 발표 직후 결혼발표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직후다시 병역특례 부실근무로 군대에 다시가야 할 상황에 처했을때,

 

길거리에 나가 누구한테 시비나 걸고 맞아서라도 군대를 뺄까? 난 가정이 있으니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와이프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 싸이인데 너무 후지다"라고 말을 해서 군대에 다시 가기로 결심!

 

아.. 여자 참 잘 골랐다. 정말 뭐 하나 빠지는게 없는 박재상이구나 싶다.(외모야 뭐.. 좀.. 음... ;;)

 

군에 다녀온 사람들 대다수가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을 꾼다는데 다시 갔다오니 그런꿈을 꾸지 않는다고..

 

두번째의 군생활로 싸이는 좀 더 성숙해진다.

 

여자아이돌만 살아남는 군부대에서 싸이는 그와 버금가는 어쩌면 그 이상의 파워를 가진 존재였다.

 

그 힘으로 다시 분발하는 싸이.

 

DJ DOC의 "나 이런사람이야"란 곡에 참여하면서 다시 한번 이름을 날리고

 

대형기획사에 들어가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만으로도 더 크게 될 수 있는 싸이였지만

 

힘든 연예계에 보호자가 필요했다고 말하며 YG에 들어간다.

(5년동안 계약금없는 조건에 싸인했다는 얘기가 있음)

 

 

 

YG와 싸이의 만남..

 

 싸이는 뒤에서 든든한 보호자 역할을 해주는 YG를 등에 업고 "강남스타일"이란 노래를 작사/작곡 한다.

 

그리고 강남스타일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활을 담당한 뮤직비디오.

 

조수현 감독과 의기투합하여 강남스타일이 아닌 싸이스타일로 완성하게 된다.

 

 싸이의 아이디어 십여가지를 더하고 최종편집은 YG대표 양현석이 맡았다고 한다.

 

이렇게 탄생한 "강남스타일"

 

유투브에서만 십만조회수를 훌쩍 넘으며 하루에도 몇십건의 패러디물들이 쉴새없이 쏟아지고 있다.

 

CNN과 LA타임즈등 미국과 영국의 유명채널에서 보도되고

 

급기야 미국에서 잘나가는 아침생방송에 출연해 말춤까지 추게 된다.

 

 

 

 

 

싸이.. 단지 운이 좋았던 것일까? 한마디로 NO!

 

 

 타고난 끼와 재능으로 인정받는 실력파 뮤지션이자 스타 프로듀서

 

데뷔전에 조PD의 앨범작업에 참여했으며,

 

데비후에도 공연비디오상 및 최우수작품상 외 다수의 상을 수상하고

 

2010년에는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 프로듀서상과 서울가요대상 최고앨범상을 거머쥐기도 하였다.

 

본인앨범 대부분의 곡들에 작사/작곡/편곡 등을 직접하였으며

 

이승기를 단숨에 스타덤에 올려놓은 "내 여자라니까" 작사/작곡과

 

렉시의 "애송이"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DOC의 "나 이런사람이야"라는 곡 작업에도 참여했다.

 

 

되던 안되던 최선을 다하는 싸이 

 

싸이의 노력실력이 늘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노래 못하는 싸이는 방송프로그램에 나와서 말한다. " 아 노래를 못하고 말만 잘해도 가수가 되는구나"라고..

 

가수가 본인입으로 노래 못한다는 소리 쉽지 않을텐데 노래 못한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의 공연을 본 사람들은 알것이다.

 

정말 춤을 열심히 춘다.  노래도 못하는게 꼭 라이브만 한다.

 

그런 공연을 보고있자니 신이나서 가만히 앉아만 있을수가 없다.

 

그 마력에 빠진 사람들로 인해  싸이 공연은 늘 매진이다.

 

 

예상과는 다른 박재상의 인간성

 

우리나라는 왜 그런지 솔직하다고 하면 친절하지 않다, 혹은차갑다라는 단어들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혀 다른 의미이긴 하나 연관성이 전혀 없지는 않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런데 싸이.. 인간 박재상은 솔직하면서 친절하다. 그리고 배려가 깊다.

 

인맥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꾸준하다.

 

예전 어떤 기자가 싸이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상당히 부담스럽워 고민하고 있는데,

 

 만나는 순간 웃음으로 정중히 인사하는 싸이에 한번 놀라고

 

인터뷰내내 편하고 재미있게.. 그리고 솔직해서 응해주는 싸이모습을 보고 팬이 되었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 한 방송에서는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옆에 앉은 여게스트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려 이슈가 되기도 했다.

 

 

물론 방송에서 보이는 싸이의 모습이 인간 박재상의 참모습일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많은 점들이 닮아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당당히 보여주려 노력한다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로 나는 "강남스타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신기록을 세우는 싸이의 뉴스에서 최초라는

 

단어를 볼때마다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넘치는 끼를 주체할 수 없는 이남자.. 우리만 알고 즐기기에는 너무 아깝다.

 

( 강남스타일이 아닌 싸이스타일은 앞으로 더 많은 매체를 통해 더 많은 국가로 퍼져나갈것이라 감히 단언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