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2013. 1. 7. 10:27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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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현장보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2013.01.05

 

 

지난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일본 미국 중국 등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했다.

막중한 역활과 무거운 책임감이 뒤따르는 만큼 나라마다 격에 맞춰서 대우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이 같은 대우를 극구 마다하는 청렴하게 사는 지도자가 있다고 한다.

바로 지구반대편에 있는 우루과이 대통령이다.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서도 차로 30여분을 달리면 레몬밭이 많은 한적한 시골마을에는

허름한 초소에서 경찰두명이 집을 지키고 있는 시골집이 있다.

 

 

 

그 집에는 허름한 차림의 백발노인이 살고 있는데 그가 바로 우루과이의 대통령'호세 무히카'이다.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한 무히카 대통령은 그의 거처, 즉 대통령 관저로 취재진들을 안내했다.

방 하나, 부엌하나에 거실딸린 1층집, 조명기구를 설치할 곳도 없을만큼 비좁은 이곳이 한 나라의 지도자가 머무는 대통령 관저이다.

 

 

책으로 가득찬 안방

 

 

 

낡은 냉장고에는 직접 만든 요리와 재료들이 비닐에 아무렇게나 담겨져있고

대통령 내외의 식사는 물론 다리하나를 잃은 강아지 '마누엘라'의 끼니도 대통령이 직접 준비하며

마누엘라는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강아지(대통령이 식사를 준비해주기때문에)라고 말한다..

 

 

 

 그는 이 가진 것은 오히려 행복을 앗아간다고 말한다.

 

 

 

직접 트랙터를 몰고 농사를 지으며, 비닐하우스에서는 꽃도 키운다.

 

 

 

올해로 26년 된(우리나라돈으로 200만원) 낡은 자동차

그것이 유일하게 우루과이 정부에 신고되어있는 본인명의로 된 전재산이다.

농장과 밭 트렉터 등은 상임의원인 부인명의이고 이 부부의 재산을 넉넉히 계산해도 우리나라돈으로 2억원 정도이다.

 

 

 

 

월급의 2/3는 복지시설에 기부하며, 수도에 있는 대통령궁은 노숙자시설로 사용하자고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지금은 비어있는 상태이다.

 

 

마음만 먹으면 가장 화려하고 최고의 생활을 할 수 있는것이 한 국가의 대표이자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이다.

그럼에도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만약에 거대한 집에 살고 있고 가정부가 있다고 합시다.

친밀감이 없는 생활일 거예요."

 

 

무히카 대통령의 이런 삶의 태도는 젊어서 부터였다고 한다.

투파마로스(물질주의 비판 게릴라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부자들을 털어 가난한 사람을에게 나눠주는 등의

홍길동같은 행보를 보였다.

 

총 6번의 총상을 입었고 14년의 수감기간을 지냈으며, 수감기간 중 두번의 탈옥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경험들을 하면서 지나친 물질주의가 삶을 헤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근검절약하는 태도를 다른 대통령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인류미래를 위해 지나친 소비풍조에 맞서자고

세계 정상들에게 강하게 호소하기도 했다.

 

 

 

 

 

전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도 우루과이는 무히카대통령의 집권 후 매년 5%의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대통령의 서민적인 모습에 친근한 느끼거나 지지하는 시민들도 많고, 정치 이념이 다른 사람들도 그의 청렴도만은 최고라고 말해주고 있다.

 

 

 

 

 

 

대통령 혼자 검소한 생활을 한다고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전부 도울 수는 없다고 말한며

우루과이 사회 전체의 노력을 촉구했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돈을 갖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무히카 대통령은

권력과 돈, 민심의 관계를 간단히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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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 무히카 대통령에게는 예외인 것 같다.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권위적인 태도와 권력남용의 횡포에 내키지는 않지만 점차 익숙해져가고 있다.

우루과이 사람들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에게서 청렴과 근검절약 정신을 배우고 있다.

높은 자리에 계신분인만큼 그의 목소리가 더 멀리 전달될꺼라 믿는다.

 

대한민국...

근검절약까지는 아니더라도, 청렴한 권력자들이 좀 더 많아지고 그들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게

힘이 되어주는 국민들이 되길 바래본다. 

다큐 2013. 1. 1. 05:28

어쩌면 우리보다 똑똑한 지능을 가진 동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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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왕국 - 똑똑한 동물들(121230)

2012년 영국 BBC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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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은  많은 난관에 부딪힐수록 더욱 영리해진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미국 전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박새는 어느 지역이든 생김새는 모두 같지만 거친환경에 사는 박새일수록 영리합니다.

 

 

실험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눈으로는 보이지만 유리를 치워야만 먹이를 꺼낼 수 있습니다.

 

 

두마리 모두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의 부모(가족)들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좌측 박새의 부모는 박새들의 천국인 남쪽지방에서, 그리고 우측 박새의 부모는 알래스카에서.. 

 

 

실험을 해본 결과 좌측 박새는 쳐다만 보고 먹이를 먹지 못하는 반면, 우측 박새는 손쉽게 유리를 들어내 먹이를 먹습니다.

박새들은 가족으로 부터 이러한 재능(혹은 지능)들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박새의 뇌는 서식지 환경이 험난할수록 더 크고 발달되어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예컨데, 적당한 환경에서의 동물은 어쩌면 더욱 영리해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처럼 동물들을 교육시킨다면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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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타 쿠르스

 

 

17년간 과학자들을 놀래킨 바다사자 "리오"는 4살짜리 아이의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숫자는 물론 알파벳도 구분이 가능합니다.

위의 실험은 가운데(H)를 먼저 보여주고 나서 양쪽에 있는 숫자와 알파벳을 보여줍니다.

 가운데와 같은 문자를 고르게 하는 실험인데요. 리오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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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과학자 아이린은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서 동물이 문자와 숫자 이상을 배울 수 있으며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회색앵무인 "알렉스"를 25년간 교육했고 죽은 알렉스를 대신해

다른앵무새인 크리핀를 같은 방식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지?"

" 종이"

 

"이게 무슨 모양이지?"

"네모"

 

이게 무슨 색이지?

"주황"

 

이뿐 아니라 숫자와 문자도 알아보고 읽을 수 있습니다.

 

크리핀 옆에서 제자와 반복적으로 학습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되묻기를 반복하다 보면

크리핀이 인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알렉스는 크리핀과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물의 같고 다름과 그 사물의 묘사까지도 가능했으니 말입니다.

 

 

알렉스는 사람의 말을 할 줄 알았고, 유치원생들도 어려워하는 질문에도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알렉스가 죽었을때 유명잡지와 신문에 그 소식이 전해지고 부고가 실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좋은 교육은 대상이 앵무새이든 사람이든 최상의 능력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요?

과연 동물이 지능검사에서 성인을 이기는 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해 보일수도 있겠지만 지난 50년동안 동물들은 상상이상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 관속에 먹이에 부리가 닿지 않아 돌을 집어 넣어 결국 먹이를 꺼내 먹는 모습

동물들은 도구를 이용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또 사람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배우기도 합니다.

동물들은 지식을 쌓기도 하고, 창의력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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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년동안 과학자들은 놀라운 발견을 하게됩니다.

 

숫자와 기억력의 대가들이 이곳에 모여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교토대학입니다.

 

그중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똑똑할지도 모르는 침팬치..어린천재로 불리는 "아유모"가 있습니다.

아유모는 교토대학에서 태어나 평생 공부를 해왔습니다.

 

 

숫자를 순서대로 클릭하는 시험따위는 아유모에게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저보다도 빠름;)

아유모는 다섯살때 과학자들이 내는 지능검사의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11살인 지금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기억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해보시겠어요?

 

 

각 숫자들의 위치를 기억합니다.

 

 

숫자를 가린 후 각 숫자의 위치를 기억해서 순서대로 클릭해 내는 테스트입니다.

 

아유모는 이 숫자와 위치를 기억하는데 1초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자 그럼. 이렇게 생각을 해보도록 하죠.

숫자가 보이는 시간이 0.06초라고 해봅시다.

사람에게는 숫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지 않을지 모르지만, 아유모는 그 숫자와 위치를 기억합니다.;;

 

델몽트 曰 :

어쩌면 동물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훌륭한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유모가 숫자와 기억력에 보이는 남다른 지능은 100% 교육에서 오는 건 아닐겁니다.

우리가 교육한다고 해서 0.06초동안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숫자를 외울수는 아니 그 숫자를 볼 수 조차 없을테니까 말이죠.

 

이래도 학대하시겠습니까?

 

 

다큐 2012. 12. 31. 13:26

2012년의 주인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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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스페셜 송년특집 "우리는 2012년을 살았다."(1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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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열심히 살다보면 어느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꿈꾸던 삶에 성큼 다가가기도 합니다.

 

 

 

지난해 오디션프로그램 참가자에서 번듯한 가수로 변신한 그들.. 울라라세션이 있습니다.

리더 윤택씨는 그동안 건강상의 이유로 멤버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지 못했는데

이날은 1년전 그들이 인생역전을 이뤄낸 무대, 뜻깊은 자리라 오늘은 그도 힘을 내보려 합니다.

 

1년 전 아마추어에서 1년만에 프로로 돌아 온 그들.

 

그들에게 2012년은 참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멤버이름을 딴 소속사와 춤 연습을 할 수 있는 연습실

 

 

그리고 곧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콘서트도 합니다.

 이번공연에 리더 윤택씨는 함께 할 수 없기에 그의 빈자리가 누가 되지 않도록

멤버들은 잠까지 줄여가며 더욱 연습에 몰두합니다.

그래도 일년전까지 거리를 전전하며 연습하던 때와 비교하면 행복하단 말로도 표현이 부족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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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던 한해.. 그들에겐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순간이 참 많았습니다.

 

 

그들을 위한 5,000개의 좌석은 이미 매진된 상태.

드디어 막이 오르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15년 무명생활, 차비가 없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미사리에서 공연하던때가 있었습니다.

몸상태로 인하여 이번공연에 함께 할 수 없었던 리더 윤택씨도

마지막곡을 멤버들과 함께하였습니다.

15년전 어떤일이 있어도 무대에서 함께하자던 약속..

그 약속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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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나은 내일을 위해 고단한 현실을 묵묵히 이겨내는 사람들

이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보겠다고 거리로 나선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 대학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했던 그녀

그녀의 평범하던 삶이 갑자기 바뀐 것은 일하던 학교에서 일방적인 해고를 당한 2006년입니다.

 

투쟁이 뭔지도 모르던 아줌마들이 먹고살기 위해 싸우다 60일의 농성끝에 다시 복직,

그 덕에 지난 4월 총선때는 비정규직의 대표로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습니다.

 

국민들에게 청소하는 아줌마도 정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녀는

우리 사회 800만 비정규직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평범한 가정의 청소노동자였던 김후보

무소속 후보등록을 위한 기탁금 삼억원.. 시민들의 후원금으로 후보등록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선거때만 어려운 사람들 돕겠다고 말해놓고 돌아서면 끝이고 나몰라라하는 사람들때문에

자신이 출마했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사회에서 힘없는 어떤이를 위해 또 길거리로 나와 연설을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용감하다하지만 또 대다수의 누군가들은 무모하다고 합니다.

그녀의 도전이 우리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사회 한켠의 어려운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그녀가 바라는 세상은 힘든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이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1229 대선 후, 46,017명의 사람들이 청소노동자 김순자후보를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로 되돌아 갔습니다.

 

 

2012년 총선과, 대선

그녀에겐 정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그녀의 도전으로 조금이나마 세상이 변했길 바래봅니다.

그리고 그녀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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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임 / 72세

올해 첫 시집(치자 꽃 향기) 출간

 

손녀의 상장

                 - 진 효 임 -

 

이 학생은 평소 열심히 공부하고

받아쓰기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기에

상장을 드립니다.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을 받던 날,

초등학교 1학년인 손녀가

고사리 같은 귀여운 손으로

상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공부로는 처음 받아본 상장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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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또 한분의 특별한 한해를 보낸 분이 계십니다.

바로 98세 최고령 운전면허를 취득한 박기준 할아버지.

뒤늦게 딴 운전면허 덕분에 난생처음 신문에도 나왔다며 그 신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십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박기준 할아버지는 운전면허 취득이 큰 자랑이고 기쁨이라고 하십니다.

 

 

 

 

차를 산지 얼마 되지 않아 마당에 널어놓은 도토리를 피하려다 기둥에 차를 박아 찌그러졌다며 하소연하십니다.

도토리 사건 이후로 가족들의 만류로 운전을 쉬고 계신다고 합니다.

 

두달만에 운전대를 잡습니다. 운전면허학원 강사님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직접 운전을 하고 가시려고 하십니다.

 

 

시속 40km, 할아버지만의 안전속도로 병원까지 막힘없이 무사히 잘 도착하십니다.

삼십분만에 병원에 도착한 할아버지, 운전면허 덕분에 병원가는 시간이 반으로 줄었다고 하시며

이것이 운전면허를 딴 이유라고 말씀하시며 행복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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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름, 시청광장에 다시한번 대한민국의 함성이 울려퍼졌습니다.

 

30회 런던 올림픽

빛나는 도전, 갚진 승리 그리고 승리만큼이나 사람들 마음을 울렸던 사진 한장

 

 

 

 

그 어느때보다 바벨의 무게로 힘들었을 한 해 였겠지만

많은 사랑을 받아 행복한 해였다고 말합니다.

 

올림픽 실패 이후 모두가 장미란 선수의 은퇴시기를 궁금해 하던 때

그녀는 다시 바벨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전국체전 10년 연속 3관왕의 기록에 달성했습니다.

 

 

그녀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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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같은 출근시간 지하철 안

그 속에서 미소를 머금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12년만에 교도소에서 세상밖으로 나온 지 두달이 된 박정선씨

 

그는 다시 잃어버렸던 방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교통카드를 신기해 하는 그는 하나하나 모든게 재미있다고 합니다.

 

 

12년전 28세의 정선씨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으로 수감되었습니다.

사회와 격리되어 있다가 지난 10월 형을 마치고 출소한 정선씨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자신도 출근을 하고, 현장으로 가고 있다는것이 사회인으로서 또 본인의 꿈과 미래를 위해서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는것이 기쁘다고 말합니다.

 

정선씨는 출소 후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일이 좀 서툴지만 나무를 가공할때가 가장 뿌듯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나무지만 깍고 다음으면 어딘가에서 중요한 역활을 한다고 합니다.

자신도 어딘가에서 중요한 역활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출소한 정선씨를 받아준 곳, 같은 상처가 있는 사장님의 배려였습니다.

출소 후 한동한 힘든 시간을 보낸 사장님은 앞으로 수많은 세상의 편견과 마주하게 될 정선씨를 격려하고 싶다고 합니다.

 

정선씨는 이번에 투표권이 나왔다고 좋아합니다.

 

 

12년만에 새로 시작하는 삶 하나하나가 뜻깊고 행복하기만 한 정선씨는 오늘도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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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을까 말까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이땅의 청춘들..

살다보면 잠시 방향을 잃을때도 있죠.

그럴때 친절하게 방향을 일러주는 화살표 하나 있다면 삶은 더 좋아질까요?

 

언제부턴가 버스정류장에 화살표가 붙었습니다.

사람들은 버스회사나 공무원들이 붙인거라고들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올해 24살 청년 이민호씨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버스정류장 곳곳에 손수 화살표를 붙입니다.

 

 

작년 11월부터 시작한 화살표 붙이기 올 한해만 민호씨의 손을 거친 정류소만 천오백군데가 넘습니다.

 

민호씨는 올 2월에 졸업한 취업준비생 입니다.

남들은 취업준비로 바쁜시기 화살표붙이기를 시작한 민호씨는 오히려 얻은 게 있다고 합니다.

 

"취업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진짜 잉여구나 진짜 이 사회에 필요 없나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됐는데

작은 한 개인이 이 사회에 얼마나 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정작 가족들은 운동을 하러 나가는 줄 알았지 미처 생각도 못했다고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부모님은 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민호가 운이 좋았던 것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올해도 하루하루 노력하다보니 그렇게 좋은 일이 생겼듯이

내년에도 이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다보면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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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어떻게 살아오셨나요?

우리들 모두가 올 한해의 주인공은 아니었을까요?

다큐 2012. 12. 29. 13:21

조선혁명가 사암 - 털끝까지 병든 시대 당장 개혁하라.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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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네트워크특선. 조선혁명가 사암 - 털끝까지 병든 시대 당장 개혁하라.

 

 

 

 

 

 

 

고종 32년, 전남 강진군 만덕사

1895년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을 휩쓸던 시기 민란의 불씨가 된 불온서적을 찾기위해 관군들이 들이닥친다. 

 

 

관군들이 찾던 이 책의 핵심내용은 백성이 살기좋은 나라가 되기위한 개혁을 주장했고

곧 농민혁명의 교본이 되었다. 

 

 

 

 

그 책은 순조때인 1818년에 완성된 목민심서이다.

 

 

하지만 이 책이 역사속에 등장한 것은 44년이 지난 1862년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내리고 백성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던 철종 13년때,

이때는 관직을 돈으로 사고팔기도 하고 부안, 거창, 진주 등 71곳에서 민란이 발생했던 시절이다.

 

무보수가 원칙인 아전(이방,형방 등)들이 민가를 돌며 세금을 뜯어내 백성들의 고통은 날로 더해진다.

 

무능한 군주로 알려진 철종은 신하들과 지식인들에게

삼정(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 정부 보유 미곡의 대여 제도)문란과 민란의 해결책을 올리라 명하였고

이에 전라도 장성의 대학자 노사 기정진은 아전의 횡포를 꼬집으며,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권하는 상소를 올린다.

 

 

 

牧民(목민) = 백성을 다스리다.

心書(심서) = 마음으로 올리는 글

 

즉,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말을 적은 책이라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19년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했던 반역죄인이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권력자들의 부패실상을 조목조목 꼬집어 내고, 그것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성토한 것이다.

이때문에 이 위대한 책이 오랫동안 불온서적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나온 이후에는 공직자윤리의 교과서가 되었으며 지금의 공직자들에게도 본분을 일깨워주는 고전으로 통한다.

 

 

 

조선시대 후기때는 청렴한 관리들에게 내리는 상, 일명 "청백리" 제도가 있었고

조선왕조 오백여년간 218명이 관리들이 이 상을 받았다.

그런데 임진왜란 전에 상을 받은 관리가 전체의 162명이며, 이는 전체의 3/4에 해당하며

이후 56명이 이 상을 받은걸로 보아 임진왜란 이후 탐관오리가 넘쳐났었다는 걸 알수있다.

 

 

조선시대때 아들을 낳으면 군역을 내는 제도가 있었다. 이로인해 가난한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힘들어졌고,

결국엔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아버지까지 생겨난다.

이를 본 다산 정약용은 애절량이라는 슬픈 시를 남기기도 했다.

 

 

 

목민심서는 愛民(애민)을 강조했고, 그 애민이란

오늘날 권력이란 의자에 앉아있는 분들이 친해하는 혹은 사랑하는 국민여러분

운운하듯 불특정 다수의 국민들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독거노인과 어린이, 병든 자, 상을 당한 자, 이재민

모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책이었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통하여 200백여년전에 이미 복지제도를 제시했던 것이다.

 

목민심서 전편에 흐르고 있는 논리는 관의 입장에서 나온 해결책이 아닌 백성의 편에 서서

 관의 행포와 부정부패를 폭로 탄핵하고 있는 것이다.

 

" 당연히 왕이 관료가 백성을 지배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이것에 대한 정치가 처음 만들어질 때의

그런 시작부분에 대한 것을 일깨우는 것이고, 그게 정치의 본령이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개혁, 사회의 개혁은

전부 다 처음에 백성들을 잘살게 하고 불쌍히 여기는 근본을 튼튼하게 만드는 뿌리내리게 하는 그게 정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 박현모(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정치가 정조]저자-

 

 

올바른 세상을 위해 관료들의 도덕적 행동강령을 강조한 목민심서

이것은 기존 제도 안에서 권력자 개인의 윤리의식에 기대서 개혁을 꾀한것이다.

 

 

 

다산이 시대를 앞선 해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젊은시절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높은 벼슬까지 하던 다산은 전라도 해안지방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강진에서의 긴 유배생활은 그에게 고통과 동시에 많은 것을 일깨우게 해주었다.

 

궁핍했던 유배기간동안 거처도 없던 다산에게 초당을 마련해준것이 외가였던 해남윤씨 집안이었다.

 

초당과 반나절 거리 해남윤씨종가 녹우당에는 도서관을 방불케하는 장서들이 남아있어 이곳을 호남 실학자의 요람이라고 한다.

소실되고 현재 남아있는 책들이 만여권에 이를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방대한 양의 서적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듯이.

다산은 유배기간동안 해남윤씨종가에서 그 방대한 서적을 토대로 학문탐구에 몰두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다산은 글쓰기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어떤방식으로 이끌어 나갈지를 생각하고

백성들에게 이익이 가게 하는 연구를 꾸준히 해왔으며, 이를 사업이라고 칭했다.

 

다산은 사회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교육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그는 유배시절 교육의 힘이 닿지 못했던 서민가정의 아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그들은 이학래,이강래, 황성등이 있으며, 그들에게 둔한 것, 막힌 것, 답답한 것,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라는 것이 그의 가르침 중 하나였다.

 

 

 

 

제자 이학래는 다산의 형,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정리하는데 도움을 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로

다산학문의 편집과 정리를 담당하는 역활을 했다.

 

다산의 남달랐던 교육법은 당시 중국식 천자문(하늘天  따[땅]地 검을玄 누룰黃)이 하늘과 땅을 이야기 하다 갑자기 색으로 넘어가는게

아이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것이며, 도움이 되지 못할거라 했다.

그래서 기존 학습에 아동발달과정을 무시한 점을 개선해 새 방향을 제시하는 대안교과서 "아학편"을 내놓는다.

 

하늘天   [땅]地   아비父   어미母   임금 君  신하 臣

- 아학편의 2천자문 中 -

(한글자를 배우면 다른글자까지 연상시켜 알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그외에도 제가 각자의 적성에 맞는 집중교육(황상-문장, 이학래-과거교육)을 시키기도 했으며 수업방식도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서로 질문과 답이 오가는 방법을 통해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배움내용을 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가르쳤고 그런런제자들은 실제로 다산의 목민심서나 흠흠심서 등에 참여하기도 했다.

게다가 다산은 집필에 참여한 제자들의 이름을 책에 고스란히 나열했다. 요즘말로 하면 공저(공동저서)라고 분명히 발힌것이다.

이는 논문표절로 억룰진 요즘시대에 바로 새겨야 할 학자적 윤리인 것이다.

 

 

 

48권 16책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목민심서가 단 일년만에 저술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교육법이 시골의 무지렁이 제자들을 양반자제 버금가는 지식인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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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유배기간내에 썼던 또 다른 책 경세유표.

 

 

"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 "

 

목민심서가 조선시대라는 나무의 가지를 건드린 것이라면

경세유표는 뿌리를 건드리고자 한 것이었다.

 

경세유표를 죽은 후에 알리라 했던 다산,

살아서는 경세유표를 발표할 수 없던 이유..

경세유표 그것은 바로 국가 개혁론이었다.

 

이 책에는 권력세습이 심각했던 당시의 상황을 꼬집으며, 권력의 간소화를 주장하고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밖에도 불평등항 과저제도를 개혁해 만인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으며 부국강병을 주장했던 실학자답게 병력강화에 대한 방법론 제시,

복지제도 등 사회 전면적인 쇄신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다산은 경세유표를 통해 현실적인 토지개혁방안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정전제인데. 국가가 전국의 토지를 소유해 9으로 나누어 8개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1개를 공동경작하게 해서

그것으로 납세를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비록 당대에는 금서로 통했던 경세유표지만 잠시나마 이땅을 밝혔던 민중의 혁명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겠다.

 

 

 

다산 정약용 사후 24년..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이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재물을 억지로 빼앗자 분노가 폭발한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킨다.

이 작은 봉기의 불씨는 곧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반 봉건과 반 외세를 외치며 혁명이라는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으로 확대된다.

이것이 바로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이 이끈 동학농민혁명이다.

 

 

 

안타깝게도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안으로는 갑오경장 밖으로는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 사람은 평등하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다."

"토지를 균등하게 분작해야 한다."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대표적인 주장은, 실학의 기본사상이기도 했고, 다산학문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후 다산유배지 부근의 사찰과 민가를 수색하며 불온서적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바깥에 나오기에는 아직 위험한 책.

다산은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경세유표를 문하생인 이청과 벗인 이순에게 주었고,

이 책은 결국 동학혁명을 이끈 전봉준과 김계남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 과정을 강진읍지[현재남아있지 않다]와 명승초유전에서 전하고 있다.)

 

하지만 다산이 동학의 진원지인 전라도로 유배를 왔다는 점,

아직 봉건사회에 머물러 있던 농민들이 근대적 사고를 접할 수 있었다는 점,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되었던 비결이란, 바로 당대의 금서 경세유표가 그려낸 세상은 아니였는지...

 

18년 유배생활, 전남 강진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다산이 고뇌속에 그려낸 세상은 꿈에 그리기에도 너무 일렀다.

 다산이 회갑되던 때에 자신이 지은 호는 다음시대를 기다린다는 뜻의 "사암 "이다.

 

 

 

 

 

 

사암 정약용, 그 오래전 그가 말하던 백성들과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세상,

현재 우리는 그러한 세상속에 살고 있는걸까?

 

 

 

사암 정약용 그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우리는 다시한번 되새겨봐야하지 않을까?

 

 

 

 

 

 

 

 

다큐 2012. 12. 28. 21:21

취재파일 4321 벼랑 끝 검찰, 버려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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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4321

20121209

벼랑 끝 검찰, 버려야 산다.

 

 

'검사스럽다'(형용사)

논리없이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는 데가 있다.

- 국립국어원 '신어(신조어)'자료집 -

 

 

검사스럽다는 신조어가 생길정도로 한때 콧대높던 검찰,

요즘 각종비리로 얼룩져 11월 30일 또 한명의 검찰청장이 여론의 퇴진압박에 못이겨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도화선은 김광준 고검 부장검사가 유진그룹으로부터 금품 6억원을 받은 혐의로 경찰이 수사를 하려고 하자

특임검사(자기식구는 자신들이 조사하겠다)를 임명한다. 그렌저검사와 벤츠여검사 사건 다음으로 세번째다.

결국 특임검사는 김광준 부장검사를 구속했지만 곧바로 성추문검사 사건이 도마위에 오른다.

 

절도혐의로 조사중인 40대 여성 피의자와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은 혐의로 서울 동부지검의 전모검사(30)가 조사를 받게 된다.

경찰은 두차례나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이를 모두 기각한다.

 

지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석동현 전 서울 동부지검장도 검찰의 영장청구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위기에 빠진 검찰은 이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사상초유의 내분까지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검찰총장이 검찰개혁을 추진하면서 중수부장을 감찰하라하고, 중수부장은 부당한 조치라며 검찰총장에게 역으로 사퇴하라 한다.

 

 

 

 

결국 검찰총장까지 사퇴를 했음에도 검사들의 비리정황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이번엔 브로커 검사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의 박모검사가 프로포폴 불법투여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피의자에게 자신의 매형이 일하는 법무법인을 소개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박검사가 뒷돈을 받고 봐주기 구형을 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최재경 중수부장의 와이프가 삼성의 특혜없이 들어갈 수 없다는 도곡동의 삼성엔지니어링 빌딩 지하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들며 재벌개혁과 관련해 특해의혹에 휩싸인다.

 

 

연일 터져나오는 검찰의 비리, 과연 검사 개인의 자질때문에 이런 황당하고 충격적인 일들이 생긴것인지..

전문가들은 견제받지 않는 검찰, 권력의 비대화가 검찰윤리를 무디게 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제 검찰 스스로의 개혁은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평소 검찰개혁에 관심을 보이던 김희수 변호사와 인권운동가 오창익, 

그리고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형사법을 강의하고 있는 서보학과 하태훈 이렇게 4명이 모여

2011년 "검찰공화국 대한민국" 책을 발간하며 앞으로 법무부와 검찰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는 한국 검찰에 대해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치외법권 지대에 위치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수사할때,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고, 부실수사, 편파수사, 표적수사

이것을 시정할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힘이 막강한 겁니다. 형 확정되고 나면 검사가 형집행 정지로 풀어주면 됩니다.

그러니까 사법부도 능가하는 권력을 갖고 있고..."

- 김희수 변호사 -

 

"우리나라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수사권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요.

수사권을 갖고 있는 검찰이 기소에 대한 독점적인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 비해서 보다 막강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 박용철(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시민사회단체인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에서는 지난 5년동안 검찰권을 오남용되었던 사건들을 자체 조사하고,

이에 관여했던 검사들에 대해 자진사퇴등를 요구하기도 했었다.

 

 

 

 

 

 

지난 1988년 검찰의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검찰총장 2년 임기제를 도입했지만

이 제도 도입 후 17명의 경찰총장 가운데 11명이 임기를 채우지 못했고,

이 중 9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식으로는 검찰개혁문제에 근본적으로 다가갈수 없다는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중요하거나 특별한 수사를 위해서 제한적으로 행사가 되어야 하는 중수부가 그렇지 못한 권력의 입김으로 이용됐기 때문에 18대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 문재인후보도 중수부 폐지입장을 명확히 밝히기도 했었다.

 

"대검 중수부가 정치권들을 압박하니까 뭐 여든, 야든, 아이고야, 아이고 뜨거워라 하면서 중수부 폐지에 대해서 뒤로 물러섰고 검찰들이 어쨌든 지금은 숨을 죽이고 있지만 이제 조금 시간이 지나면 조직적으로 저항할 것이 뻔합니다."

- 이재근(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팀장)-

 

 

이번 검찰사태는 수십년간 국민의 지탄과 불신을 받아온 검찰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도한 권한과 권력이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면 이제 검찰은 좀 더 낮은 자세로 민주주의의 균형과 원칙을 생각할 때이다.

다큐 2012. 12. 26. 15:54

매년 1억원의 돈을 기부하는 노신사 그리고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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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09일 오후 6시 25분경..

연말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서울의 명동거리

한 남자가 일억원의 수표를 자선냄비에 넣고 사라진 일이 벌어진다.

 

당시 현장에 있던 자원봉사자는 15년간 봉사를 했지만 봉투를 넣는 분을 처음 보았기에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흰 봉투(수표1억원과 이름을 남기지 않은 편지)를 넣고는 택시를 타고 유유히 사라진 노신사

 

 

 

 구세군 사회복지당당관의 말로는 지난해에도 1억 천만원을 기부해주신 분이 계셨는데

그분께 사연이 있었으며, 동일인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작년 1억천만원과 함께 남겨진 편지와, 올해 일억원과 함께 남긴 편지의 필적이

동일인물 이라는 것.

 

 

 

 

 

 

 ▼ 아래는 일억원의 수표와 함께 남아있던 편지의 내용이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시민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서 통크게 기부할거라 하기도 하고 자신이라면 그렇게 못할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돈이 얼마나 많은 분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해와 올해 2억 천만원의 돈을 기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사회에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돈이 많은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적지 않다.

힘들게 고생하며 번 돈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 쓸 줄 아는 그런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

이런 대부분의 분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기부를 하고 있다. 정작 도움을 받는 사람은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그러한 고마운분들은 그 마음을 보거나 듣지 않았다고 해서 나눔을 받은 분들의 마음을 모르실까?

요즘 보통의 우리들.......

늘 스스로의 아픔만으로도 벅차하며, 남을 돌보거나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다고들 생각하지는 않는지..

올해는 평년보다 유난히 춥고 긴겨울이라고 하는데

힘들겠지만 나보다 조금 더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작은 성의나 도움의 손길을 보내본다면

마음만은 따듯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내공을 굳이 발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기특함을 나를 아는 모든이들에게 알리는 팔푼이가 되더라도

나눔이란 걸 한번 시작해 보는건 어때요?

다큐 2012. 12. 24. 06:21

121223. KBS스페셜 "성공하는 대통령의 조건, 당선 후 6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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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최고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의 새 주인이 결정되었다.

 

박근혜 당선인은 지지자들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당선이 확정 된 지금부터 내년 2월 25일 취임식까지 남은시간 67일

성공적인 대통령 5년을 위한 결정적인 그 67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 박근혜 후보의 당선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엄청난 실망에도 불구하고 안정을 선택한거죠.

연속성과 안정을 선택했다는 측면에서 지금 현재 사람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라고 하는 부분들이

다시 한번 보수세력에게 희망을 걸고 좀 더 나은 개선이 이루어질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는 거라고 생각이 되고요."

 

 

 

 

"국민 대다수의 입장에서 보면 개혁을 하면서 상당히 안정을 유지하겠구나, 그리고

상당히 경제 회생을 가져올 이런 후보구나,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당선의 벅찬 순간,

짜릿한 승리 하지만 거기엔 기쁨과 감격보다 더 묵직한 책임감이 있다고 관련인들은 말한다.

 

 

"왠지 이겼을 때 그 짧은 순간 당선됐다는 환호는 굉장히 좋았는데 택시타고 돌아 오면서 느끼는 그 무거운 책임감

이제 진짜 노대통령이 말씀하신대로 험한시간이 다가오는구나..그런 아주 묘한 느낌이 들었다."

 

당선인에게는 수많은 기대와 요구가 쏟아진다.

선거기간의 대립과 상처도 보듬어야 하고, 앞으로 5년간 국가운영의 비젼도 제시해야 한다.

지금부터 박근혜 당선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한 메세지이자 리더쉽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당선인의 첫 행보에는 아주 중요한 메세지가 담겨져 있다.

 

5년전 이명박대통령은 임기초기에 가장중요한 것이 안보와 외교로 생각하고 주요국에 어떤 메세지를 전할지

하는 부분에 대한 생각을 했다고 당시 임태희 비서실장은 말한다. 실제로 이명박 당선인은 가장 먼저 주한 미,일대사를 차례로 만났고, 곧이어 전경련을 찾아 이건희 등를 비롯한 주요그룹 총수들을 만났다. 이는 비지니스 프렌들리한 정부를 만들겠다는 메세지가 담겨있었다.

 

 

10년전 노무현 당선인 비서실장을 지낸 신계륜의원은 당시 노무현 당선인의 초기행보를 좀 더 신중하지 고민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고 하면서

오바마 미국대통령은 당선직후 바다에서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진 한장을 공개했는데. 이는 어머니를 그리는 그런 마음으로 미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노무현 당선인은 가장 먼저 제주도로 향해 차분한 생각을 가질 시간을 가졌다. 다른 당선인들과는 다소 이례적인 첫 행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가진 시민단체 신년하례식 참석은 당선인의 철학이 반영된 것 이었다.

 

 

 

"대통령의 통치행위도 끊임없이 사람들과의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 결론 내려야 되는 것이지

옛날에 임금님이 현명한 결정을 내리면 모두가 따라야 되는 것 같은 그런 권위주의적인 통치시대는 아니어야 한다.

이것이 그 당시 시대정신이었죠. 이런 시대정신에 맞게 충실하게 행보를 하신거죠"

안희정(당시 노무현 당선인 정무팀장)

 

제 18대 대통령 당선인 박근혜,

선거 다음날인 12월 20일, 그녀의 첫 행보는 현충원 참배였다.

그리고 오후에는 주변국들(미,일,중)의 대사를 만나 북한문제 한반도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당일 중앙선대위 해단식에서 중요한 메세지가 나온다. 핵심은 "통합"이었다.

 

 

 

 

당선된 순간에 나를 찍지 않았다 할지라도 당선인은 그들 모두의 대표자가 되어야 한다.

- 안희정(당시 노무현 당선인 정무팀장) -

 

승자들의 전리품을 나누는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서 자기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끌어들이고, 통합을 이루느냐 하는 것이 당선인의 가장 중요한 책무가 될 것 같다.

 - 강원택(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

 

 

 

남은 67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꾸리는 일이다.

임시위원회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이후 처음 생겼지만 법적인 기구로 자리잡은 것은 2003년 2월

노무현 당선인 시절 대통령직 인수에 관한 법률이 재정되면서 부터였다.

이 인수위원회를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하느냐에 앞으로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수위는 국정5년의 청사진을 만든다.

주요 국정과제를 선정하고, 초대 청와대와 내각의 주요 인사를 선정하는 것도 인수위의 몫이다.

 

 

 

 

어느 정권보다도 빠르게 인수위를 조직한 노무현 당선인은 당선 11일만에 인수위를 구성한다.

획기적으로 정치인 위원장과 관료출신 부위원장을 제외한 인수의원 24명은 모두 개혁성향의 학자로 구성했다.

 

 

"주위에서는 정치인이나 관료출신 이런 사람들 많이 추천했을 겁니다.

엄청나게 많은 추천이 들어왔을 텐데 그걸 다 물리치고 학자들만 100% 구성한 것은

노대통령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데요. 관료나 정치인도 물론 유능하지만

인수위 작업에는 학자가 가장 적임이다 그렇게 보는거죠"

 

 

 

학자중심의 노무현 인수위와는 달리 복합형으로 구성한 이명박 인수위

서로 구성방식은 달랐지만 성공적인 인수위 구성에 관한 공통의 기준은 있다.

이는 바로 대통령의 정책을 이해하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 정책 집행 단계에서 효율적이라고들 한다.

 

 

 

 

 

 

인수위가 구성되고 활동이 시작되면 언론과 국민들은 인수위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인수위는 당장의 성과에 욕심내기 쉽다. 하지만 인수위의 과욕과 부적절한 언행은

당선인의 초반 지지도 하락이라는 악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실재로 17대(이명박정부) 인수위의 설익은 정책발표로 여론의 비판을 받은 이명박당선인의 취임전 지지도는

당선직후보다 약 10%가량 하락하기도 했다.

 

 

 

 이명박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위원 곽승준은 지난 5년에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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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취임 전 67일은 어쩌면 사람을 선택하는 시간이다.

시대의 요구와 국민의 열망 그리고 당선인의 집권철학을 구현하기 위한 인사의 원칙과 기준을

67일동안 마련해 놓지 않는다면 정권은 출발부터 삐걱거릴수 있다.

그래서 인사가 만사고 인사가 곧 메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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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대통령들의 취임식 장면을 보면 그들은 모두 자신감에 넘쳐있다.

당선인 신분에서 대통령의 되는 순간 그들은 마음속에 성공한 대통령, 존경받는 대통령이라는 꿈이 있었을 것이다.

 

18대 대통령 박근혜 당선인도 이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선의 기쁨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성공한 대통령으로 임기를 마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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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임기 5년 생각보다 길지 않다.  어쩌면 대통령 임기 5년보다 당선 후 67일은 더 중요하지 않을까?

 

 

 

 

 

 

과거 반세기 동안 극한 분열과 갈등을 빚어왔던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도록 하겠습니다.

 

과거 반세기 동안 극한 분열과 갈등을 빚어왔던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도록 하겠습니다.

 

과거 반세기 동안 극한 분열과 갈등을 빚어왔던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도록 하겠습니다.

 

다큐 2012. 12. 16. 12:21

2012년 학교폭력으로 희생된 학생 2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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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이 가장 안전해야 할 곳 학교에서...

그리고 남겨진 그들의 이야기

 

 

 

 

 

 

엘리베이터 안, 주진이는 집이 있는 4층을 눌렀다가 다시 최상층 14층을 누른다.

 

주진이는 그렇게 우리곁을 떠나게 된다.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글 하나 없이 주진이는 그 무서운 길을 혼자 가버렸다.

 

다름아닌 주진이의 17번째 생일, 바로 그날 싸늘한 주검으로 나타난 것이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주진이의 부모님은 그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거리 4층에서 1층까지의 거리

엄마는 그 엘리베이터에서 숨이 막힘을 느낀다.

 

엘리베이터도 사람도 무서워 부부는 한동안 집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이사를 가든 그 아무리 먼 곳으로 도망을 쳐도 바뀌는 사실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에서 아직도 딸의 흔적과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딸이 떠난 후 두달만에 그 뒤를 따라간 친구..

 

 

부부는 그 친구를 생각하면 죄인이 된 심정이라고 한다.

 

대체 어떤 고통들이 이 아이들이 세상을 떠나게 만든걸까

 

도망칠수도 없는 부부는 죽음보다 깊은 이 슬픔을 그저 견디어 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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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전

37에 낳은 늦둥이라 엄마 아빠에겐 세상의 전부였던 혜선이..

 

성격도 활발하고 친구들도 많아 걱정없던 딸이었는데

중학교2학년때 부터 무려 4년간이나 폭력서클에 시달려 온 사실을

혜선이가 가출하면서 남겨놓은 편지를 통해 엄마는 알게 되었다.

 

 

 

 

사고한번 치지 않던 착한 딸이라 금방 돌아올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혜선이는 가출한지 3일만에 경기도의 한 아파트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혜선이의 일기장에서는 괴롭힘을 당한 내용과 죽어서 갚아주겠다는 글들이 적혀 있었다.

혜선이 아빠는 홧병으로 얼마 전 먼저 떠나시고 엄마는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아직도 혜선이의 물건을 못 버리시겠다며 이사할때도 가지고 다니신다는 혜선이 어머니

 

 

부모에게는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이 평생을 괴롭히지만

아이가 힘들어 했던거에 비하면 부모들은 자신들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들도

아무것도 아니라고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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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 또 다른 남자아이. 익태

35명의 보고 있는 교실에서 폭행을 당했으며,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것도 밝혀졌지만

법원은 그들에게 우발적으로 발생한 폭행이었고, 익태에게도 30%의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이미 죽은 학생들은 말이 없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은 피의자 당사자나 가족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받는일도 흔치 않다고들 하는데

어른들이 바로서야 그 밑에 자라나는 아이들이 바르게 보고 배우는 거란 생각이 보편적이지 않은건가?

 

이런식의 대응으로 인해 학교폭력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피해자의 상처는 고려하지 않고, 어린 가해자들만 감싸는 게 언제까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할런지 의문이다.

 

 

 

 

다큐 2012. 12. 16. 04:43

당신이 알아야 할 커피에 관한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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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분석결과 커피의 시작은 에티오피아 남부에서 시작되었다는 테스파예는

"에티오피아 커피 포럼"이란 곳에서 커피를 연구한다.

이 단체는 에티오피아 커피숲을 보호하는 중요한 연구단체이며, 야생생물 및 자연환경을 보호

커피생두 재배자의 생계를 보호하기 위해 야유숲 인근을 유네스코 생물권으로 만들려 노력하고 있다.

야유숲에는 다양한 종의 야생커피가 있으며 커피산업에 위기가 닥쳤을 때에 이 숲이 큰 도움이 될 것 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영국런던에는 국제커피협회 본부가 있다. 국제커피협회는 커피시장에서 UN(United Nations)과 같은 역활을 한다.

원유다음으로 거래량이 많은 무역품이 바로 커피이다.

그만큼 매일 엄청난 양의 커피가 거래되는 만큼 매우 중요한 무역품이다.

전 세계인의 20%가 커피를 마시고 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 품종별로 아라비카와 로보스타 두가지인데 두가지만 상용으로 재배한다.

아라비카에서는 향이 좋은 생두가 나오고 로보스타는 맛은 좀 떨어지지만 병충해에 강하다.

두가지 모두 적도지역에서 재배된다.

 

 

 

 

좋은 커피를 찾아다니는 커피 헌터 스테픈은 커피도 농작물이기에 일조량에 따라 매년 커피수확량과 품질이 달라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좋은 커피를 찾아 다니는 일이 보람은 있지만 끝이 없는 일이라고 한다.

커피는 중요한 농산품임에도 품종을 구분하기가 매우 힘들며, 아무리 좋은 커피라고 해도 잘 알려지지 않으면

제값을 받기 힘들다고 말한다.

 

 

 

 

 

 

 

세척과 건조과정을 끝낸 생두는 길고 먼 유통과정을 마친 후 로스팅에 들어간다.

생두의 종류에 따라 가장 적합한 로스팅 방법과 시간이 각각 다르며,

이 로스팅과정을 통해 향이 없던 생두에 맛있는 풍부한 향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전세계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위해 커피업계는 광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기도 한다.

 

설립한지 백년이 지난 이탈리아의 가장 큰 커피 회사는 독특한 광고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소비자에게 커피의 역사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스스로를 맛을 찾아 떠나는 유목민이라고 부른다는 음식전문기자 비토리오 카스텔라니는

커피를 연구한 결과 거의 알려져있지 않은 흥미로운 몇가지 사실들을 발견한다.

 

초기 커피는 음료수가 아니라 목동이 먹던 음식이었으며,

로스팅도 하지 않은 생두를 양고기와 함께 비벼먹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음료수원료가 되어 에티오피아에서 예멘으로 건너간다.

아랍에서는 추출한 커피에 강한 향을 첨가하는데, 커피 자체의 향을 즐길 수 있게 한 것은

커피에서 첨가된 향신료를 분리한 투르크인들이다. 그렇기에 현재 우리가 마시는 커피가나오기까지

큰 역할을 한 것 또한 투르크인들이다.

 

 

 

커피에 대해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기록한 사람은 알피니라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그의 책은 1951년 베니스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커피를 음료수로 불렀고 커피 열매, 생두, 로스팅, 커피의 효능등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이스탄불에서 커피숍 문화가 처음 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 정부는 당시 커피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법으로 금지했음에도 터키인들은 계속 커피를 마셨고, 그 문화는 서유럽으로 점점 퍼져나갔다.

 

서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런던에 생긴다.

 

런던대학교 마크만 엘레스 교수는 오늘날 커피가 이렇게 대중화가 된것은 17세기 시대적 발전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커피숍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었기에 계급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커피 자체를 즐기기도 했지만, 그걸 마시면서 얘기하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물론 그 당시에는 커피와 물을 붓고 하루 종일 끓여가면서 물이 졸아들면 아무커피나 붓고 다시 끓이고를

반복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지금의 커피와 비교하면 아주 형편없었을거라 상상한다고 한다.

 

커피숍은 곧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나라에 따라 그 문화도 조금씩 달라진다.

 파리나 프랑스등 일부에서는 고급 커피점이 생기기도 한다.

 

계몽주의 시절, 부르주아는 당시 일반적인 음료였던 알코올이 아닌 커피를 좋아했기에

커피를 마시면 의식 있고 지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커피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준 거라 전문가는 말한다.

 

국제커피협회 이사인 네스터 오소리오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소비자가 커피에 대해 안목이

높아지고 더 많이 알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10년 전 처음으로 브라질에서 열린 컵 오브 엑셀런스는 맛있는 커피를 생산하는 누구나 참여가능하며

올해는 250여가지의 커피가 이 대회에 출전한다. 심사는 각국에서 온 커피전문가들이 하며

이곳에서 우승을 하게 되면 최고의 커피로 인정받는 것이다.

 

한때는 투기로 인한 커피과잉문제가 찾아오기도 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00년대

새로 출시된 커피상품이 바로 인스턴트 커피이다.

 

 

1901년 일본계 미국인 화학자가 인스턴트커피를 개발했고, 1938년 널리 시판되기 시작했다.

원두를 볶아 냉각 분쇄한 후 증기나 열탕으로  커피액을 추출, 그 후 열풍 건조하여 향이 오래지속되는 것이다.

인스턴트커피를 진정한 커피라 여기지 않는 사람이 많았지만 시장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1950년을 기점으로 기계와 커피를 좋아하는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 에스프레소 기계가 생겨나기 시작하고

커피추출이 단순하고 빨라짐으로서 더 많은 이들이 커피를 즐기게 된다.

그러면서 우유를 섞으먹기 시작하면서 우유를 통해 커피의 본 맛을 알게 되고

본고장에서는 평범한 음료인 카푸치노가 이탈리아 스타일로 전 세계 입맛을 사로잡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커피로 잠을 깨고 점심과 저녁을 먹을 때에도 커피를 마십니다.

이것이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커피가 전 세계인에게 특별한 것이 된 이유이다.

현재 카페인이 없는 커피등 다양한 종류의 커피가 개발되면서 질병저항력이 강한 커피가

나올 수 있기에 더 맛있는 커피를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기 위해서 커피나무 유전자 연구가 필요하다.

 

다큐 2012. 12. 13. 18:13

박정희 프레이저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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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Washington

 미국 워싱턴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국회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하려는 사건이 발각되고, 이것을 미국언론들은 코리아게이트 사건이라 불렀다.

 

 

 

1977년 2월 3일

 

 

미 의회는 프레이저의원이 이끄는 국제관계 소 의원회에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프레이저의원은 박정희 정권을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1977년 6월 22일

Fraser Committee

프레이저 청문회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고 오랫동안 중앙정보부(KCIA ;Korea Central Intelligence Agency) 부장을 지낸 김형욱.

그는 박정희의 최측근에서 그에게 충성을 바친 인물이다.

박정희의 3선개헌에 앞장서 2인자로 군림하며 위세를 떨치던 김형욱은 3선개헌안이 통과된 직후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 버림받은 것에 배신감을 느낀 김형욱은 미국으로 망명을 간다.

 

그런 김형욱이 프레이저청문회에서 증언을 할 것을 알고 박정희는 민병권장관에게 김형욱이

청문회에 나갈것을 만류하라는 특명을 내렸고, 김형욱은 모든것을 보장해줄테니 제3국으로 떠나라는 조건을

단호히 거절하고 미국회에서 박정희 정권의 비밀들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2년후, 김형욱은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후 살해되었다.

 

 

 

1978년 10월 31일

 

프레이저 보고서가 의회에 제출되었다.

이 보고서에는 박정희의 집권기관 전체에 대한 조사내용과 한국의 경제 성장에 관한 내용등이 담겨있었다.

 

"왜 한국은 그토록 빨리 성장할 수 있었을까? "

 

그 비밀이 프레이저 보고서에 담겨있었다.

 

하지만 박정희정권은 보고서의 모든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1년 후 그는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살해되었다.

그 이후에도 박정희가 키워놓은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프레이저 보고서를 차단하고, 박정희의 경제 신화를 보호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프레이저 보고서의 존재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한국이 빠른 시간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가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이 핵심이었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중장년층은 박정희가 한국의 수출주도형 전략을 제시해서 한강의 기적을 만든거라고 믿고 있다.

 

 

프레이저 보고서와 비밀이 해제된 미국의 기밀문서들도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 미국은 이승만정권을 세워 남한의 경제성장을 시도하였으나,

이승만과 친일파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이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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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공산주의 국가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경제력은 세계 50위, 남한은 101위에 그쳤다

 

 

 

 

케네디는 친미국가 개발전력(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발표한다.

 

여러 전문가들을 통해 공산주의 국가가 늘어나는 이유를 찾아보니

공산주의 혁명은 가난한 국가들에서 발생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렇기에 가난한 국가들의 경제 개발에 힘써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당시 남한이 북한과의 경제력차이로 인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진 않을까 미국에서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때 남한 상황이 위험스런 방향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보고서가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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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부 심리가 강력한 반미 감정으로 폭발해서 혁명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따라서 미국이 개입했다는 비난을 듣지 않으면서

남한의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Walter McConaughy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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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는 즉시 매카나기를 미국으로 불러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로 임명하고,

메카나기의 책임아래 새로운 한국의 발전전략을 담은 종합보고서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장면 정부와 함께 경제부흥을 최우선 목표로 내걸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

 가난한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했다면 장면은 뛰어난 지도자로 존경받았을테지만 행운의 여신은 장면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란 인물에 대해 조사한다.

가장 먼저 케네디가 알게 된 정보는 박정희가 일제때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파라는 점과 해방 후 자신의 동료들의 전부 밀고해서

죽게 만들고 자신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로인해 박정희는 미국에서 스네이크 박이라 불렸으며, 미국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공산주의가 되버리면 일본이 위험하고 미국의 태평양 방어라인도 위태로워지기에 미국은 꼭! 한국을 발전시켜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경제 개발에 집중 투자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의 수상을 만나 한국의경제

개발에 협조하라고 요청하고 일본은 한국을 일본의 경제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이를 승락한다.

 

 

 

이 후 박정희는 일본과 미국의 권력자들을 만난다.

 

 

 

그곳에서 박정희는 일제때 천황의 군인들을 양성했던 나구모 육군 중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선생님께서 저를 이렇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본사람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침략을 당했던 한국인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기에 자신들의 계획이 어렵지 않을꺼라 확신한다.

 

 

그 외에도 박정희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침략자들에게 존경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일본 극우파들은 박정희와 손잡과 한국을 경제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검은돈을 주기 시작한다.

 

 

 

케네디도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박정희를 백안관에 초대했다.

그 회담에서 박정희는  미국에 특별안정기금 2억 5천만달러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을 알고 있는 미국은 박정희에게 경제개발계획 수정을 제안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경제참모조차 이를 인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어느것 하나 터무니 없고 현실성 없는 경제개발계획을 바꾸려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1962년 증권시장이 파탄이 난다.

박정희 집권을 위해 그의 조카 사위 김종필의 부하들이 정치자금을 마련하려고 사상최대의 주가조작 사기를 친다.

김종필은 이 주가 조작 사기로 2천만에서 3천만 달러(현재 약 9천억원)을 벌어들였다.

그리고 이 자금의 일부는 박정희에게 상납되었고, 공화당 창당 자금, 야당 교란 작전에 쓰였다고 한다.

한참 걸음마를 떼려는 한국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뿐아니라 박정희는 계획없이 화폐개혁을 시도했으며, 예금동결 등 한국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때 박정희에게 화폐개혁의 위험성을 설명해준 사람이 삼성의 이병철이었다.

 

예금동결을 해지하라는 미국에게 박정희는 미국이 개입할 권한이 없다고 버텼다.

그 일로 미국이 더 이상 원조를 하지 않겠다고 하자 박정희는 태도를 바꾼다.

그때부터 미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경제개발정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일로 미국은 박정희의 참모들을 전부 새로 교체하였다. 새 관료들은 미국에 협조적이었고, 박정희는 이에 저항했다.

이에 미국은 한국신문에 원조를 전면 중단하겠다는 기사를 내고, 그에 동요한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될까봐 박정희는 이에 응하게 된다.

조금이라도 박정희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원조를 끊겠다고 협박을 했고 미국의 적극적개입과 주도를 맡는 수출주도형 개발전력으로 전략된 것이다.

 

사사건건 박정희는 반대의견을 냈고 그 때마다 미국은 당근과 채직을 적정히 사용하여 미국의 계획대로 한국경제는 발전해나갔다.

 

 

 

 

그리고 박정희 수십명의 기자들과 산업현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언론을 통해 한국민족의 갈길은 본인이 제시한다며,

수출 10억불을 목표를 달성할 것이고 수출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룩할것이라고 언론플레이를 하고다녔다.

 

이를 본 국민들은 실제로 성장하고 있는 한국경제에 감탄하며 이 모든것이 박정희의 지도력덕분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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