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2012. 12. 13. 02:11

고개숙인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손기정(1912.08.29~2002.11.15)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일제 강점기(1910~1945)에 있던 우리 선수들은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에 출전해야만 했다.

시상식사진에서 가운데(금메달) 손기정 선수와 좌측(동메달) 남승룡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손기정선수는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리고 있어 경기 후 일본으로부터 마라톤 금지조치를 당했다.

당시 손기정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고 악수를 한 사람이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였다.

 

 

한국인"손기정" 일본의 마라톤 세계제패를 꿈꾸게 하다.

 

신의주에서 태어나 16세때 단둥의 회사에 취직하여 신의주에서 압록강 철교를 건너 단둥까지 매일 20여리(1리=0.392km,20리=7,854)를 뛰어다녔던 그는 가난해서 달리는 것 밖엔 할 수 없었던 소년이었다.  육상경기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던 그가 양정고보(養正高普 ; 현 양정고교)에 입학 후 마라톤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각종 경기에서 우승 및 신기록 수립하기에 바빴던 그때, 일본 올림픽 파견 1차 예선에서 2시간 26분 14초의 성적을 거두며 일본일들로 하여금 마라톤 세계 제패를 꿈꾸게 했다.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손기테이란 이름으로 출전하다.

 

‘한국 대학생(koreanischer Student)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그 한국인(der Koreaner)은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지나 뛰었습니다. 그가 이제 트랙의 마지막 직선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DHM) 독일방송기록보관실(DRA) 자료)

당시 베를린 올림픽을 중계하던 아나운서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올림픽의 꽃, 마라톤 고개숙인 금메달리스트

 

그의 베를린올림픽 신기록 2시간 29분 19초 2

42.195km를 당시 인간이 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마의 2시간 30분대를 넘어섰다.

세계 각국에서 온 56명의 마라토너들과 함께 출발한 그는 레이스를 1등으로 마무리하며 마지막 100m에서 온 힘을 다해 11초라는 무서운 집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승선을 통과한 그의 표정은 금메달리스트의 표정이 아니었다. 어떠한 환호도, 만세도 부르지 않았다. 일장기를 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한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작은 신발을 신고 고통스럽게 뛰어 얻어낸 세계적인 그 영광이 내 조국의 것이 아니라 내 조국을 짖밟고 있는 일본의 것이었기에

스타디움에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흘러나올 때 그의 표정은 한 없이 슬퍼보였고 더욱 고개를 숙였다.

동메달은 획득한 양정고보 선배이던 남승룡도 마찬가지 였다.

비록 일본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하여 메달을 획득했지만, 그들은 분명 한국인이었다.

 

 

 

 

▲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손기정 체육공원에 전시되어 있는 손기정 동상

 

 

 

영광을 가로 챈 일본의 만행

 

손기정의 금메달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희망이었다. 비록 일장기를 달고 출전하였지만 많은 조선인들이 그의 금메달 소식에 기뻐했다.

금메달을 딴 후에 조선중앙일보에 이같은 소식을 전하는 기사와 사진이 한장 게재되었다.

손기정의 시상식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당시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렸던 손기정이었지만 측면에서 찍은 사진인지라 일장기가 환연히 보이는 사진이었다. 조선중앙일보는 일장기를 흐리게 해서 잘 안보이게 한 후 사진을 내보냈고, 당시 검열을 맡던 총독부에서는 인쇄품질 문제라 생각하고 검열에서 통과시켰다.

그 후 동아일보에서 이 사진을 다시 한번 게재시켰는데 당시 손기정옷에 흐리게 남아있던 일장기를 완전히 지운것이었다. 이 일로 인해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고, 동아일보는 무기한 정간을 당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리려 한 손기정에게는 이후 경기 출전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올림픽에서 일본에게 금메달을 안겨준 손기정이었으나, 식민지 금메달리스트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 줄리 만무하였다. 마라톤 금지를 당한 손기정은 은행원으로 근무하며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 후 본격적으로 마라톤 코치로 활동하며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서윤복이 우승시키고 1950년에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세 선수가 1,2,3등을 독점하게 하였다. 이후 대한체육회와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과 서울시 육상경기연맹 이사장, 88년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을 하며 성화 봉송자로 나서기도 하였다.

그외에도 KOC 상임고문과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팀 고문을 맡았으며 뼈속까지 마라토너였던 그는 한국 마라톤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며, 202년 11월 15일 생을 마감했다.

2011년에는 체육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는 체육인으로써 최고의 영광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고대그리스 청동 투구의 반환

 

베를린올림픽 당시 우승자에게는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를 부상으로 수여했지만 손기정에게 바로 전달되지 못하고 50년간 베를린의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86년에 손기정에게 전달되었으며, 1994년에는 이 청동투구를 국가에 기증하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

 

손기정이후 올림픽 마라톤에서 처음으로 황영조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때 황영조선수만큼 이슈가 되었던 인물이 바로 손기정이었으며 손기정은 누구보다 기뻐하며 "오늘은 내 국적을 찾은 날이야"라는 가슴아픈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 손기정 자서전(학마을B&M)

  

 

 

▲ 서울시 중구 만리동 2가 6-1에 위치한 손기정 문화체육공원의 조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