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2012. 12. 29. 13:21

조선혁명가 사암 - 털끝까지 병든 시대 당장 개혁하라. 다산 정약용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MBC 네트워크특선. 조선혁명가 사암 - 털끝까지 병든 시대 당장 개혁하라.

 

 

 

 

 

 

 

고종 32년, 전남 강진군 만덕사

1895년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을 휩쓸던 시기 민란의 불씨가 된 불온서적을 찾기위해 관군들이 들이닥친다. 

 

 

관군들이 찾던 이 책의 핵심내용은 백성이 살기좋은 나라가 되기위한 개혁을 주장했고

곧 농민혁명의 교본이 되었다. 

 

 

 

 

그 책은 순조때인 1818년에 완성된 목민심서이다.

 

 

하지만 이 책이 역사속에 등장한 것은 44년이 지난 1862년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내리고 백성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던 철종 13년때,

이때는 관직을 돈으로 사고팔기도 하고 부안, 거창, 진주 등 71곳에서 민란이 발생했던 시절이다.

 

무보수가 원칙인 아전(이방,형방 등)들이 민가를 돌며 세금을 뜯어내 백성들의 고통은 날로 더해진다.

 

무능한 군주로 알려진 철종은 신하들과 지식인들에게

삼정(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 정부 보유 미곡의 대여 제도)문란과 민란의 해결책을 올리라 명하였고

이에 전라도 장성의 대학자 노사 기정진은 아전의 횡포를 꼬집으며,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권하는 상소를 올린다.

 

 

 

牧民(목민) = 백성을 다스리다.

心書(심서) = 마음으로 올리는 글

 

즉,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말을 적은 책이라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19년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했던 반역죄인이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권력자들의 부패실상을 조목조목 꼬집어 내고, 그것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성토한 것이다.

이때문에 이 위대한 책이 오랫동안 불온서적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나온 이후에는 공직자윤리의 교과서가 되었으며 지금의 공직자들에게도 본분을 일깨워주는 고전으로 통한다.

 

 

 

조선시대 후기때는 청렴한 관리들에게 내리는 상, 일명 "청백리" 제도가 있었고

조선왕조 오백여년간 218명이 관리들이 이 상을 받았다.

그런데 임진왜란 전에 상을 받은 관리가 전체의 162명이며, 이는 전체의 3/4에 해당하며

이후 56명이 이 상을 받은걸로 보아 임진왜란 이후 탐관오리가 넘쳐났었다는 걸 알수있다.

 

 

조선시대때 아들을 낳으면 군역을 내는 제도가 있었다. 이로인해 가난한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힘들어졌고,

결국엔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아버지까지 생겨난다.

이를 본 다산 정약용은 애절량이라는 슬픈 시를 남기기도 했다.

 

 

 

목민심서는 愛民(애민)을 강조했고, 그 애민이란

오늘날 권력이란 의자에 앉아있는 분들이 친해하는 혹은 사랑하는 국민여러분

운운하듯 불특정 다수의 국민들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독거노인과 어린이, 병든 자, 상을 당한 자, 이재민

모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책이었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통하여 200백여년전에 이미 복지제도를 제시했던 것이다.

 

목민심서 전편에 흐르고 있는 논리는 관의 입장에서 나온 해결책이 아닌 백성의 편에 서서

 관의 행포와 부정부패를 폭로 탄핵하고 있는 것이다.

 

" 당연히 왕이 관료가 백성을 지배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이것에 대한 정치가 처음 만들어질 때의

그런 시작부분에 대한 것을 일깨우는 것이고, 그게 정치의 본령이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개혁, 사회의 개혁은

전부 다 처음에 백성들을 잘살게 하고 불쌍히 여기는 근본을 튼튼하게 만드는 뿌리내리게 하는 그게 정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 박현모(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정치가 정조]저자-

 

 

올바른 세상을 위해 관료들의 도덕적 행동강령을 강조한 목민심서

이것은 기존 제도 안에서 권력자 개인의 윤리의식에 기대서 개혁을 꾀한것이다.

 

 

 

다산이 시대를 앞선 해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젊은시절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높은 벼슬까지 하던 다산은 전라도 해안지방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강진에서의 긴 유배생활은 그에게 고통과 동시에 많은 것을 일깨우게 해주었다.

 

궁핍했던 유배기간동안 거처도 없던 다산에게 초당을 마련해준것이 외가였던 해남윤씨 집안이었다.

 

초당과 반나절 거리 해남윤씨종가 녹우당에는 도서관을 방불케하는 장서들이 남아있어 이곳을 호남 실학자의 요람이라고 한다.

소실되고 현재 남아있는 책들이 만여권에 이를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방대한 양의 서적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듯이.

다산은 유배기간동안 해남윤씨종가에서 그 방대한 서적을 토대로 학문탐구에 몰두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다산은 글쓰기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어떤방식으로 이끌어 나갈지를 생각하고

백성들에게 이익이 가게 하는 연구를 꾸준히 해왔으며, 이를 사업이라고 칭했다.

 

다산은 사회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교육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그는 유배시절 교육의 힘이 닿지 못했던 서민가정의 아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그들은 이학래,이강래, 황성등이 있으며, 그들에게 둔한 것, 막힌 것, 답답한 것,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라는 것이 그의 가르침 중 하나였다.

 

 

 

 

제자 이학래는 다산의 형,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정리하는데 도움을 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로

다산학문의 편집과 정리를 담당하는 역활을 했다.

 

다산의 남달랐던 교육법은 당시 중국식 천자문(하늘天  따[땅]地 검을玄 누룰黃)이 하늘과 땅을 이야기 하다 갑자기 색으로 넘어가는게

아이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것이며, 도움이 되지 못할거라 했다.

그래서 기존 학습에 아동발달과정을 무시한 점을 개선해 새 방향을 제시하는 대안교과서 "아학편"을 내놓는다.

 

하늘天   [땅]地   아비父   어미母   임금 君  신하 臣

- 아학편의 2천자문 中 -

(한글자를 배우면 다른글자까지 연상시켜 알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그외에도 제가 각자의 적성에 맞는 집중교육(황상-문장, 이학래-과거교육)을 시키기도 했으며 수업방식도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서로 질문과 답이 오가는 방법을 통해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배움내용을 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가르쳤고 그런런제자들은 실제로 다산의 목민심서나 흠흠심서 등에 참여하기도 했다.

게다가 다산은 집필에 참여한 제자들의 이름을 책에 고스란히 나열했다. 요즘말로 하면 공저(공동저서)라고 분명히 발힌것이다.

이는 논문표절로 억룰진 요즘시대에 바로 새겨야 할 학자적 윤리인 것이다.

 

 

 

48권 16책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목민심서가 단 일년만에 저술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교육법이 시골의 무지렁이 제자들을 양반자제 버금가는 지식인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

.

.

.

 

여기 유배기간내에 썼던 또 다른 책 경세유표.

 

 

"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 "

 

목민심서가 조선시대라는 나무의 가지를 건드린 것이라면

경세유표는 뿌리를 건드리고자 한 것이었다.

 

경세유표를 죽은 후에 알리라 했던 다산,

살아서는 경세유표를 발표할 수 없던 이유..

경세유표 그것은 바로 국가 개혁론이었다.

 

이 책에는 권력세습이 심각했던 당시의 상황을 꼬집으며, 권력의 간소화를 주장하고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밖에도 불평등항 과저제도를 개혁해 만인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으며 부국강병을 주장했던 실학자답게 병력강화에 대한 방법론 제시,

복지제도 등 사회 전면적인 쇄신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다산은 경세유표를 통해 현실적인 토지개혁방안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정전제인데. 국가가 전국의 토지를 소유해 9으로 나누어 8개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1개를 공동경작하게 해서

그것으로 납세를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비록 당대에는 금서로 통했던 경세유표지만 잠시나마 이땅을 밝혔던 민중의 혁명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겠다.

 

 

 

다산 정약용 사후 24년..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이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재물을 억지로 빼앗자 분노가 폭발한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킨다.

이 작은 봉기의 불씨는 곧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반 봉건과 반 외세를 외치며 혁명이라는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으로 확대된다.

이것이 바로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이 이끈 동학농민혁명이다.

 

 

 

안타깝게도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안으로는 갑오경장 밖으로는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 사람은 평등하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다."

"토지를 균등하게 분작해야 한다."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대표적인 주장은, 실학의 기본사상이기도 했고, 다산학문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후 다산유배지 부근의 사찰과 민가를 수색하며 불온서적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바깥에 나오기에는 아직 위험한 책.

다산은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경세유표를 문하생인 이청과 벗인 이순에게 주었고,

이 책은 결국 동학혁명을 이끈 전봉준과 김계남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 과정을 강진읍지[현재남아있지 않다]와 명승초유전에서 전하고 있다.)

 

하지만 다산이 동학의 진원지인 전라도로 유배를 왔다는 점,

아직 봉건사회에 머물러 있던 농민들이 근대적 사고를 접할 수 있었다는 점,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되었던 비결이란, 바로 당대의 금서 경세유표가 그려낸 세상은 아니였는지...

 

18년 유배생활, 전남 강진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다산이 고뇌속에 그려낸 세상은 꿈에 그리기에도 너무 일렀다.

 다산이 회갑되던 때에 자신이 지은 호는 다음시대를 기다린다는 뜻의 "사암 "이다.

 

 

 

 

 

 

사암 정약용, 그 오래전 그가 말하던 백성들과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세상,

현재 우리는 그러한 세상속에 살고 있는걸까?

 

 

 

사암 정약용 그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우리는 다시한번 되새겨봐야하지 않을까?